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쿠가와 츠나요시 (문단 편집) === 유년기와 쇼군 집권기 초기 ===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아버지 [[도쿠가와 이에미츠]]가 학문에 힘쓰라고 권해, 유학([[유교]])과 [[불교]]에 심취하며 열심히 공부했다. 학문 외에도 [[노(일본)|노]], [[서화]] 등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, 직접 그린 서화가 남아 있다. 여러 영지를 거쳐 [[1661년]], 고즈케국(上野国) 오라군(邑楽郡) 다테바야시 번(館林藩) 25만석의 영주가 되었다. 측실 소생의 4남이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[[쇼군]]의 후계자 계승과는 연이 멀었지만, 배다른 형이 후사가 없자, 35세의 나이에 뜻하지도 않게 [[쇼군]]이 되었다. 아버지 이에미츠 시기에는 도쿠가와 [[에도 막부]]에 대해 아직도 반감이 남아있는 [[다이묘]] 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[[가이에키]](改易, 개역)와 [[참근교대]] 제도를 도입하는 등 반발하는 세력을 [[거세]]하고 견제하는 철권통치로 [[쇼군]]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취했으나, 츠나요시가 다스리는 시기는 [[도쿠가와]] 쇼군 정권이 자리를 잡고 안정되었던 시기라 이전의 공포정치를 풀어주고 [[문치주의]]로 전환하려고 시도했다. 권력의 중앙집권화과 재정문제, 기강 확립에 주력하고 이를 위해 [[유학]]을 융성하게 하여 덕치에 의한 정치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다. 유학을 널리 퍼트려서 명분을 무사의 윤리 의식(일본식 [[무사도]])으로 심어주려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했다. 스스로도 유학에 관심이 많아, 자신이 나서서 《[[주역]]》을 강의했을 정도였다. 이때 조선의 문관으로 정유재란때 포로로 잡혀 온 [[강항]]으로부터 [[주자학]](성리학)을 배운 하야시 가문을 중용했다. 유학적 이데올로기의 확립을 위해서 [[주자학]]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학교인 유시마성당[*湯島聖堂 탕도성당. [[도쿄대]]의 원류가 된다.]을 세워 고위 관료들의 자제가 다닐 수 있도록 했다. 전국에 조사관을 파견해서 부정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평판이 나쁜 [[다이묘]]와 [[다이칸|대관]](代官: 하급 [[하타모토]])을 유능하고 성실한 인재로 교체했다. 대관의 교체율은 80%. [[가이에키]](개역 : 영지를 뺏기는 것) 처분을 당한 [[다이묘]]가 40명이나 되었다. 인재 선별에는 능력주의 정책으로, [[도자마 다이묘]]도 대우했으며, 막부의 관리로 등용되는 [[도자마 다이묘]]가 나온 것도 이 시점부터였다.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따르던 가신 '''야나기사와 요시야스'''(柳澤吉保, 1658 ~ 1714)를 소바요닌(側用人, 측용인)에 임명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. 이때가 [[1685년]]이었다. 여기까지는 좋았다. 그런데 [[1687년]] 쯤부터 그의 행보에 논쟁이 시작된다.[* 1680년 ~ 1686년 6년간은 정상적으로 집권했었으나 그 이후 문제가 생긴것이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